박효진/ 아름다움을, 피처럼 흘리는 꽃 


 

박효진은 자신의 작업을 흘림조각이라고 부른다. 흘림조각? 엄지손가락 조형물로 유명한 세자르가 창안한 압축조각과 팽창조각은 알지만 흘림조각은 처음이다. 작업을 보면, 안료를 혼합한 레진을 조형물 위에 떨어트려(드리핑) 맺히는 우연한 효과를 의미할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깔로 조형물의 표면을 덮는 것이므로 입체와 평면, 회화와 조각이 혼성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카빙과 몰딩으로 나타난 전통적인 조각의 표현영역을 확장 시킨 경우로도 볼 수가 있겠다. 확장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의 조각은 엄밀하게 조각이라기보다는 오브제의 차용과 재구성에 바탕을 둔 오브제미술이다. 

이를테면 작가는 조형물을 위해 서양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을 호출한다. 비너스, 니케, 다비드, 그리고 포세이돈 같은 미의 주군들이다. 작가는 한눈에도 알만한 이 주군들을 차용해 원본 그대로 크기만 축소한 미니어처를 만든다. 그리고 또 다른 버전으로, 이번에는 동양의 미의식을 함축한 오브제를 차용하는데, 청화백자와 같은 골동 자기들이다. 각각 동서양의 전형적인 미적 표상을 대비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용된 표상들을 화병처럼 사용하는데, 상단 부분을 각종 꽃(조화)으로 장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안료와 혼합된 레진을 흩뿌려 조형물 위로 흘러내리다 맺히게 만든다. 더러 단색의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알록달록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준다. 흡사 꽃들이 흘리는 피 같다는 상상을 해보게도 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선 예사롭지 않은 꽃들에 방점이 찍힌다. 꽃들은 왜 어떻게 예사롭지가 않은가. 화무십일홍. 십 일 동안 빨간 꽃은 없다. 흔히 꽃은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십 일 동안 빨간 꽃은 없다는 말은 십 일 동안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것은 덧없다는 말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만큼 그림자도 깊다는 말이다. 그림자? 바니타스다. 인생무상이다. 메멘토모리다. 아름다운 것은 운명적으로 덧없고 무상하다. 그리고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예로부터 아름다운 것을 덧없고 무상하다고 느꼈고, 그 감정을 꽃에다 비유한 것으로 치자면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름다움과 그림자, 아름다움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한 몸이다. 여기에 이율배반이 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죽음의 그림자(동양에서는 음예 陰藝, 그리고 서양으로 치자면 데카당스) 때문이다. 에로스는 유한성이라는 본성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얻고 빛을 발한다. 죽음 충동이다. 죽음을 매개로 죽음을 넘어서려는 충동이고, 유한성을 빌미로 무한성을 지향하는 욕망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처럼 실패가 예정된, 그리고 좌절을 전제로 한 불가능한 기획으로부터 낭만주의가 유래했다. 그러므로 어쩌면 부조리는 실존주의보다 먼저,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운명적으로 덧없고 무상한 것을 욕망하는 것이고, 그 자체로 부조리를 증거 하는 것이다. 미학이 아닌 무엇으로도 삶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니체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그렇게 아름다움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숨 가쁘게 교차 되는 욕망의 드라마를 매개하고 증거 하는 것이 꽃이다. 시든다는, 죽는다는, 유한하다는, 그래서 덧없다는 사실 때문에 비로소 아름다운 꽃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작가는 피 흘리는 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여기에 의미심장한 것이 조화다. 조화란 영락없는 꽃 같은, 때론 꽃보다 더 꽃 같은, 가짜 꽃이다. 그건 어쩌면 시든다는, 죽는다는, 유한하다는, 그래서 덧없다는 꽃의 운명적 사실을 정지시키고 거부하고 싶은 또 다른 욕망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신들을, 미의식을, 그러므로 어쩌면 아름다움 자체를 그 운명적 현실에서 구제하고 싶은 또 다른 불가능한 기획의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조각, 회화, 오브제, 그리고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작업은 삶과 죽음이 중첩되는 숨 막히는 현장을 예시해준다.